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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2011년 05월 03일        조회 : 2946        작성자 : 관리자     

4.19학생 혁명을 되돌아보며

 

 

홍갑표 / 주미철본 고문

 

 

 

필자는 작년 이맘 때 '4.19 학생혁명 당시 경무대 공격기'를 써서 당시의 공격 부분만 간추려 생생한 체험기를 쓴 일이 있다. 그리고 그 혁명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를 생략했었다.

 

4.19는 계속되어 내려온 민중 봉기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학생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나 당시의 특수 사정으로 그렇게 된 것 뿐이지 그 연면한 맥은 우리 역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4.19의 본질적 실체는 멀리는 우리 민족 역사상 수많은 외침과 노비항쟁, 농민항쟁, 가까이는 동학농민혁명 항일전쟁에서, 항일의병전쟁을 거처 3.1항일 항쟁, 항일무장투쟁, 특히 일제의 강압과 착취가 극에 달하였던 시기 원산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이나 암태도 소작 쟁의로 대표되는 농민운동 등의 거센 항쟁 정신과 실전 투쟁속에서 찾을 수 있고 광주학생 봉기나 6.10항쟁에서도 보여준 투쟁 역량이 계속 축적되어 이것이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를 거쳐 분단 조국의 남쪽에서 4.19 학생 혁명으로 분출되어 나온 것이었다. 이 봉기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은 대자본의 집중 집적으로 비대한 자본주의 나라들 간의 전쟁이며 1차 대전 중에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한 소련이 가담함으로써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대립의 씨를 안고 전개된 전쟁이었다. 이 대립의 씨와 사대주의자들이 결국 우리를 둘로 갈라놓았다.

 

한반도에서 미소가 남북으로 대치하여 그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하면서 남쪽에서는 미군정과 친미 이승만의 지원을 받는 구 친일 세력과 신 친미 반공세력의 결합에다 월남민 중 일부사람들이 가담한 친미 반공세력들이 당시 극에 달한 경제악화와 굶주림, 대량 실업과 또 소작제적 영세소농들이 미군정의 최악의 공출(미곡수집령) 강요로 야기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나 전농(전국농민조합)의 항쟁에 대립하여 극우의 급조된 어용단체 대한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1946.3.10)과 대한독립촉성농민총동맹(한농총,19478.31)이 이승만 계의 미군정과 우익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전농과 전평을 파괴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전주 발언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추진이 기정사실화 되고 5.10 선거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김구,김규식 및 여운형 등이 남한 단독정부에 반대했으며 박헌영의 남로당은 그 투쟁방향이 '야산대'의 조직과 무장투쟁으로 잡혀갔다.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위한 5.10선거를 저지하고자 일어난 제주 민중항쟁과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군인들이 여수,순천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제주도에서는 무고한 양민들이 군경과 서북청년단에 의하여 학살되었고 여수순천 반란이 진압되면서 지리산 유격대로 연결된다.

 

결국 이승만은 5.10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대한민국이 탄생하자 북한도 이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웠으며 이듬해 중국이 장개석을 대만으로 내몰고 사회주의 정부를 세웠고 그 다음해에 6.25 전쟁이 터졌다.

 

이승만은 부산 피난시절부터 장기집권의 야욕을 강행했고 서울에 와서도 그 꿈은 집요하게 추진되었다. 결국 이 무자비한 독재와 축적된 민중항쟁의 투쟁역량이 3.15부정 선거와 마산 앞 바다에서 김주열 학생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이 떠올랐고 그 만행이 도화선이 되어 드디어 4.19학생 혁명이 폭발했다.

 

1960년은 벽두부터 뒤숭숭하였다.

 

동두천에서 미군이 두 여인의 머리를 강제로 밀어버려 사람들이 분노했고 서울역 구내 계단에서는 밀치고 뛰는 과정에서 31명이 사망하고 41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변이 있었다.

 

모처럼의 정권교체를 기대했던 국민들은 신병치료 차 미국으로 떠났던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215일 서거함으로써 민심은 흉흉하였다. "이승만이 죽였다. 아니다 미국 CIA가 죽였다. 지난번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유세 도중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등등

 

예술인이라는 사람들이 서울운동장(현재 동대문운동장)에서 이승만 박사, 이기붕 선생 출마 환영 예술인대회란 것을 열고 아부 추종했고 부정 선거 운동은 열기를 더 해 갔다.

 

밀가루 부대가 돌려지고, 고무신이 돌려지고, 막걸리통이 통째로 보급되고 심지어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투표장에 들어가고 감시원이 옆에서 지키고, 운반 과정에서 투표함이 바꿔치기 되고 개표장에서는 정전을 시키고 무더기 표를 집어넣고...

 

당선 확정일 날 민주당이 선거 무효를 선언했고 마산에서 부정선거 규탄데모에서 경찰서 등을 습격하여 8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어서 성남고교생 400 여명의 마산사건 처리 항의 데모, 부산서 1,000여 학생 데모, 피살된 김주열 시신 인양으로 제 2의 마산 데모 등이 이어지자 이승만은 마산사건 배후에는 공산당 개입 혐의가 있다고 언명하고 난동자 엄벌을 강조했다. 당시는 모든 못된 것은 모두 빨갱이 짓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관행이었다. '빨갱이다' 이것은 '무소불위(無所不位)'의 위력을 발휘했다. 어느 처소 건 어느 위치 건 가리지 않고 란 뜻이다.

 

418일 고대의 '석탑제' 후 학생들은 태권부를 전방에 배치하고 스크램을 짜고 정문을 돌파하여 종로4가까지 나갔으나 백골단, 땅벌레 등의 정치 깡패의 습격을 받고 40여명이 부상했다. 요즘 한참 나오는 김두환과 깡패들을 미화한다는 비평의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오는 한일극장의 임화수나 이정재 등이 주역이었다. 사실은 이미 서울 학생회장들간에는 4.19에 일제히 일어나기로 약속이 있었다고 들었다.

 

드디어 419일이 밝아 왔다.

 

학생들은 먼저 현재 서울 시청 별관으로 사용하는 시청 옆 국회 의사당(일제 때는 경성부 민관- 현 민족문제 연구소 이사장이신 조문기 의사가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결전 테러단체 [대의당] 당수, 친일 노동단체 [상애회]로 친일 행각 출발, 중의원 의원이 된 박춘금의 모임에 폭탄을 던지고 이광수 최남선이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전에 이 땅의 젊은이를 내몰려고 학병지원 연설을 했던 곳)으로 몰려들었다. 이철승, 박순천 의원등의 연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어 방향을 틀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국대학교, 동성고등학교를 선두로 중앙청(현재 헐리고 경복궁으로 복귀. 현 광화문 바로 안에 있었던 조선 총독부 건물)을 거쳐 3중의 바리케이트를 공격, 최루탄을 무릅쓰고 경무대(현 청와대)로 돌진했다.

 

중앙청 안에서는 소방차가 붉은 물감 물을 데모대를 향해 뿌렸고 당시 중앙청을 꺾어 도는 청와대 길 입구에 바리케이트가 있었다. 그 안쪽에 전동차 2, 그리고 길가에는 대형 상수도 관(하수도 관?)이 여러 개 있었다. 이것들이 엄폐와 차폐에 일시 이용되기도 했다.

 

공방전이 반복되다가 바리케이트가 뚫리고 경무대 입구까지 다가서면서 탈취한 소방차로 밀고 들어가자 실탄이 쏟아져 왔다. 난사와 조준이 섞여 발사되었다.

 

이 날 3만명 이상이 데모에 참가하고 142명이 숨지는 피의 화요일이었다. 이날 서울신문사가 불탔으며 반공회관을 방화하고 지금은 419도서관이 된 이기붕의 집이 공격당했으며 데모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각목과 경찰서에서 탈취한 총을 들고 차량을 타고 서울 외각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서울 등 5개 도시에 비상 계엄이 발령되었다.

 

장면 부통령 및 국무위원이 사임하고 대학교수단 데모 후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이 원한다면 사임하겠슴네다..."라는 말로 권좌를 떠났고 그 다음날 이기붕 일가가 장남이며 이승만의 양자였던 강석이가 쏜 총탄을 맞고 죽었고 강석 지신이 최후로 자결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허정이 과도 정부를 맡고 곽상훈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되고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이 땅으로 날아 왔다. 729일 민의원 참의원 선거를 치렀으나 민주당은 신 구파로 분열하였으며 제2공화국 823일에 장면 내각이 출범하였다.

 

11월에 학생들은 민족통일연맹을 조직하고 장 총리의 미소 동시 방문과 남북학생 회담을 주장하였다.

 

1961년으로 넘어가면서 미국과 보수 우익이 '실로 우려 할 마한 사태'가 전개되기 시작하고 약체 장면 내각과 정계의 혼탁이 계속되는 가운데 혁신계 정치 움직임, 민족일보 등의 민주 통일 지향의 언론 활동 통일 지향적 학생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박정희 군사 '구대타적' 조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후 부분은 5.16에서 '박정희 군사 구데타'를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4.19학생 혁명은 모처럼의 이 땅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의 호기를 맞이하였으나 미국과 군부가 반민주 반자주 반통일 군사 구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박정희가 독재 정권을 휘두르면서 김영삼의 문민 정부 등장까지 기나긴 터널을 통과해야만 해야 했다.

 

19615 ·16 군사 구데타 이후 32년 간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등이 국가안보를 최상의 과제로 내세우면서 국민의 민주적 요구를 말살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안고 지금을 살고 있다. 탐욕의 이라크 석유전쟁을 보았고 정부는 국익과 전략론을 내세워 파병을 했다. 북한의 핵문제는 다자 회담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그 전망은 미지수다. 그토록 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전쟁을 반대했고 우리도 파병을 반대했다.

 

그러나 미 신자유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세계화로 지구를 지배하려는 미 군산복합 공화당 매파들과 일부 미 국민들의 공범하에 전쟁은 불법 강행되었고 미국 매파의 승리를 선언했으나 실은 전쟁은 지금부터라는 조짐이 있다. 이라크국민과 아랍 여러 나라들, 양심적 전 세게 민중 및 대다수 양심적 미 국민과의 새로운 전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같은 낡은 법이 정리되어 민주화를 이루고 당사자이건 4자건 6자건 어떤 형태의 회담이건 자주적 민족 평화통일의 핵심이며 관건은 '민족공조 최우선'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결코 자유롭지 못 할 것이다. 4.19의 역사적 의의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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