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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2010년 12월 20일        조회 : 5139        작성자 : 관리자     

국민적 열기는 뜨거웠다. 그러나 양민학살진상규명특위의 조사활동과 그 후속조처는 그 열기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박병배(83)·박상길(75)씨. 1960년 4·19 혁명 직후 분출된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에 따라 제4대 민의원(국회)이 구성한 양민학살진상조사특별위원회(이하 진상조사특위)에서 활동했던 9명의 특위위원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이들 두 사람은 41년 전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특별법 제정” 대정부 건의안까지 의결

 

 

 

당시 진상조사특위는 11일간의 현장조사와 각종 자료수집, 피해자신고 접수 등을 통해 모두 8715명이 학살됐다는 보고서를 냈다. 또 조사를 진행할수록 늘어나는 학살사건을 온전히 규명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지속적인 진상규명 조처와 함께 악질적인 책임자 처벌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위해 시효를 적용받지 않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대정부 건의안까지 의결했다.

그러나 41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후속조처가 없었다. 왜 반인륜적 학살극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은 11일간의 조사 이후 더 진전되지 못한 것일까.

당시 유족들의 요구를 반영해 진상조사특위 구성을 먼저 제안한 사람은 박상길씨였다. 그는 당시 함양 출신 자유당 의원이었다. 학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유당 의원이 진상조사특위 구성을 주도한 것은 뜻밖이다. 그는 말했다. “당시 4·19로 정권이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가면서 거창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분출됐고, 어떤 식으로든 민심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됐다. 내 고향인 함양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때문에 기회다 싶어 거창양민학살진상조사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랬더니 민주당 다른 의원들도 자기 고장에서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다며 함께 조사를 벌이자고 했다.”

당시 진상조사특위 구성 및 활동에 조직적으로 반발하는 세력은 없었을까. 두 사람은 “그럴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잘라 말했다. 박상길씨는 그 열기를 이렇게 전했다. “당시 자유당조차 딴소리를 못하고 만장일치로 결의안을 통과시킬 정도로 양민학살 진상규명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뜨거웠다. 지방 유족들은 소를 팔아 민의원 회의를 방청하러 올라왔다. 진상조사특위 결의가 이뤄진 뒤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는 군인에게 주민을 공비라고 떠넘겨 학살당하게 했던 면장을 때려죽인 일까지 있었다. 진상조사특위를 주도한 나조차 자유당 소속이라 매우 자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무소속 의원으로 국방부 정무차관을 지낸 박병배씨도 “당시 군 일부와 정치권 내부에 반대세력이 있었지만, 4·19 혁명 직후라 명분에서 밀렸고 조직적으로 저항할 형편도 안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뜨거운 열기에도 특위활동이 온전히 진행되지는 못했다는 게 이들 두 사람의 일치된 판단이다. 박상길씨는 “방해는 없었다. 그러나 현지 조사과정에서 군청이나 경찰서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데 매우 냉랭했고, 억지춘향식이었다”며 학살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집단은 조사에 비협조적이었다고 밝혔다. 박병배씨는 특위운영 자체가 부실했고 핵심을 짚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학살 당시 사정을 좀 아는 몇몇은 양민학살사건의 첫 발동이 김창룡이라는 만주군 헌병보조원에서 걸렸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김창룡이 이승만 박사에게 달라붙어 특무대장이 된 뒤, 만주에서 하던 식대로 ‘빨갱이를 모두 없애자’고 이 박사에게 말했다. 이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특무대 각 시도지부를 통해 경찰서, 군부대 등으로 명령이 하달돼 일사분란하게 학살이 진행됐다.

하지만 당시 이 사실이 일반에게 알려져 상식화되지 못했다. 때문에 특위 위원 누구도 이승만 박사나 김창룡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전국적인 책임자 규명보다 그저 학살 소문이나 진정이 있는 지역에 무작정 내려가 그 지역 책임자를 가려내려 했을 뿐이다.” 박병배씨는 또 “특위 위원들이 너무 순진했다”고 말했다. “4·19 이후 사방에서 요구가 분출하니까 소문이 들리는 지역은 전부 다 나가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특별한 조사자료나 근거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찾아보면 뭔가 있겠지 하는 식이었고, 제멋대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도청, 경찰국, 특무대 사람들이 모른다고 발뺌하면 특위가 이를 제재할 아무런 수단도 없었다.”

 

 

“특위 위원들 너무 순진했다”

 

조사기간, 준비부족, 특위 위원들의 자질부족 등 많은 한계에도 당시 특위는 8천여명이 학살됐다고 결론짓고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 △정부차원의 지속적인 조사를 결의했다. 이는 41년이 지난 지금 정치인들도 쉽게 요구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런데 이 결의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유족회나 시민단체들은 다음해인 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5·16 이전에도 의지만 있었다면 충분히 매듭지을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박병배씨는 그해 6·27 선거로 등장한 5대 민의원 의원들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결의안을 낼 때 특위 안의 분위기는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등이 좀더 조사하면 책임자가 밝혀질 것이고, 특별법을 통해 이들은 처벌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뒤 아무도 이 문제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모두 이미 특위활동을 통해 한번 거쳐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말고도 매일 새로운 일들이 터져나왔다. 결국 특위활동은 지나치는 요식행위가 됐다.”

박상길씨는 4·19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내부 문제를 더 큰 요인으로 지적했다. “사실 진상조사특위의 조사 이후 5대 국회 출범에서 5·16까지는 10개월이나 시간이 있었다. 충분히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민주당이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박상길씨는 그 속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민주당은 신·구파의 대립에 생명을 걸고 있었다. 더욱이 학살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조병옥씨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온 사람이다. 원래 민주당 윗선들 상당수는 이승만과 한민당에 함께 있다가 갈라선 사람들이다. 학살이 일어났을 당시 내각과 민주당 지도부가 얼마나 겹치는지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집권 민주당 핵심 지도부가 한국전 전후 민간인학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더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는 분석인 셈이다.

 

이승만과 김창룡, 그 학살자들

 

박상길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도 전했다. 박상길씨는 64년 박 대통령의 대변인(공보비서관)에 발탁됐다. “내가 박 대통령에게 진상규명을 몇 차례 부탁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나도 빨갱이로 몰리는 판에 내가 그런 걸 손댈 수 없지 않느냐’며 거절했다.”

이들은 민간인학살극이라는 야만행위가 발생한 근본원인을 무엇으로 파악하고 있을까. 박병배씨는 “당시 정부가 수립됐다지만 껍데기만 있을 뿐 알맹이는 없던 때였다. 국가가 뭔지, 정부가 국민을 위해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개판’인 상황에서 정신병 환자에 불과한 만주군 헌병보조원 김창룡 같은 사람이 오더를 내려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라고 아주 냉소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박상길씨는 “이 박사가 환국해 임시정부의 독립파를 밀어내고 친일파 지주와 군인, 경찰이 만든 한민당과 손잡은 데 학살의 근본 원인이 있다”면서 “그 잔학성이나 규모면에서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나 일본의 난징학살을 넘어서는 것인 만큼 대통령을 비롯해 당시 지휘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학살의 책임은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최고권력층과 국가에 있다는 것이다.

작성일자 : 2010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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