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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2008년 12월 23일        조회 : 9618        작성자 : 관리자     

"철모 쓴 군인들이 총검술하듯 찌르고 쐈다"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가채마을 김기태(76) 할아버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한달 후인 7월 25일께 인근 군자리 솔봉에서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을 직접 지켜본 목격자였다.

"그날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군인들이 트럭에 한복과 양복을 입은 52명을 싣고 와 솔봉에서 학살하는 걸 봤어. 면사무소 옆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트럭을 세워놓고 사람들을 끌고 가는 모습이 뻔히 보이거든? 그렇게 한 사람씩 포승줄로 묶인 사람들을 일렬로 솔봉에 끌고 올라가 죽였는데, 내가 세어봤더니 52명이었어."

그는 "군인들이 끌려온 사람들을 한 사람씩 불러낸 후 총부리에 착검한 상태로 총검술하듯 찔러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밀어넣은 후 총으로 쏘아 죽였다"고 생생하게 증언했다.

김기태 할아버지가 당시 올라가 봤다는 마천면사무소 뒤 언덕에서 바라본 학살 현장.


김기태 할아버지뿐 아니었다. 증언자는 또 있었다.

마천면 추성리 추성마을 문창권(77) 할아버지는 학살이 있던 날 아침, 학살 암매장터가 된 군자리 솔봉에 마을 청년들과 함께 불려가 구덩이를 팠다. 당시 그는 한청(이승만 대통령이 1949년 12월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직접 총재직을 맡아 결성한 대한청년단의 약칭) 단원이었다.

그는 "한청 단장이 청년들을 소집했는데, 삽과 괭이를 들고 나오라고 하데? 그래서 솔봉에서 방 두 개 넓이로 가슴까지 들어가는 깊이의 구덩이를 파놓고 돌아왔는데, 저녁 여덟 시쯤 총소리가 났어. 그 일이 있고 나서 사흘만에 인민군이 들어왔지."

대한청년단원들이 미리 파놓은 구덩이속에 암매장

당시 함양군에 인민군이 들어온 것은 7월 27~29일쯤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군자리 솔봉 학살사건은 7월 25일쯤으로 추정된다.

이 분들 외에도 목격자는 많다. 마천면 덕전리 내마마을 윤갑수(83) 할아버지와 그의 형 윤정수(85) 할아버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이 난 그해 여름 남원·구례쪽에서 온 GMC 트럭에 실려온 남자와 여자 수십 명이 솔봉에서 총살됐다"고 말했다. 윤갑수 할아버지는 당시 의용경찰 특공대원으로 근무 중 이 사건을 목격했다. 그는 "한복 입은 사람과 양복입은 사람이 섞여 있었는데, 이미 고문을 당했는지 옷이 피투성이였다"고 기억했다.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솔봉 학살현장. 다리 건너 맞은편이 면사무소 뒤 언덕이다.


솔봉이 내려다보이는 군자리 군자마을에서 학살을 지켜봤던 조상순(74) 할아버지도 "길게 파놓은 구덩이에 사람을 세워놓고 철모를 쓴 군인들이 대검으로 찌른 후 총을 쏘아 죽였다"고 말했다.

이들 중 당시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했다는 김기태 할아버지와 조상순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군자리 학살사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 때 면사무소 뒤에서 죽이는 걸 봤다"고 말했다.

김기태 할아버지 "처녀도 있고 아이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 그걸 목격하게 됐나요?

△그 때 무슨 일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나오는데, 군인들이 지프와 트럭을 타고 오는 걸 봤어. 거기 면사무소 뒤 언덕에서 보면 환히 보이거든.

-그 때 끌려온 민간인들 복장은 어땠나요?
△한복도 있고, 양복도 있고 여러가지지. 어른도 있고, 처녀도 있고, 아이들도 있었어.

-그걸 확실히 봤나요? 처녀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요?
△봤지. 머리를 땋은 여자라면 처녀로 보지 뭘로 보겠어? 열 네댓살 되는 아이들도 있고, 영감도 있었어. 주로 젊은 사람들이 많았고. 등 뒤로 모두 포승줄에 묶여 있었어.

-사람들끼리 엮은 상태였나요,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묶었던가요?
△따로 묶었어.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아시나요?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그 뒤 소문으로는 전부 남로당 가입자라고 하데? 그 때 진주경찰서장 딸도 여기서 죽었다더구만. 진주서 온 사람들이라는 소문도 있고.

-진주경찰서장 딸도 남로당 가입자였단 말인가요?
△그렇겠지. 그러니까 여기서 죽었겠지.

-어떻게 학살하던가요?
△사람을 한꺼번에 죽인 게 아니라, 한 사람씩 불러내. 그리고 구덩이 앞에 세우고 총에 끼운 대검으로 확 찔러. 그렇게 해서 호에 빠지면 총을 쏴서 죽였어.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됐나요?
△52명이었는데, 한 사람은 도망갔다는 소문도 있었어.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숫자를 아시나요.
△내가 세어봤어. 그게 틀림없어. 도로 옆에서 다리를 건널 때 세어 봤어. 다리 건너기 전에 트럭 세워놓고 걸어서 거기까지 일렬로 끌고 갔는데, 그 때 세어봤어.

-군인들은 몇 명이나 되었나요?
△군인들도 몇 차나 왔어. 그 사람들 태운 차와 합쳐서 열 대쯤 됐나?

-군인들은 그날 바로 떠났나요?
△그렇지.

-솔봉에 가봤더니 맨꼭대기에는 소나무들이 있고, 그 밑엔 상수도 물탱크가 있고, 그 아래에 잡초가 우거진 곳이 있던데, 그 사람들을 암매장한 정확한 지점이 어딘가요?
△물탱크 옆이라. 아마 그 아래 옆쪽에 잡초 있는 거기일거라. 면사무소 뒤에서 훤히 보이는 곳이었으니까.

-지금도 파보면 유골이 나올까요?
△나오지 그럼.

조상순 할아버지 "개가 유골 물고 다니기도 했다"

조상순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학살이 벌어지는 상황을 내려다 봤다. 그의 집이 있는 군자리 군자마을은 학살 현장인 솔봉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그는 "그 옆에 우리 논이 있어 그 뒤에 가봤더니 여우가 송장 냄새를 맡고 파헤쳐 팔 다리가 드러나 있기도 했다"면서 "우리집에 키우던 개도 뼈를 물고 다녀 내가 개를 두들겨패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그 때가 언제였나요?
△여름인데, 몇월 며칠인지는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학살하던가요?
△미리 구덩이를 길게 파놓았어. 거기서 묶여온 사람들을 대검으로 쑤시고, 안 죽으면 총으로 쏘고, 그렇게 해서 착착 눕힌 거라.

-그 뒤 매장된 곳에 가봤나요?
△그 옆에 우리 논이 있었거든. 그래서 가봤지. 그 때는 산에 짐승들, 여우, 그것들이 송장 냄새를 맡고 막 파헤쳐 놨더구만. 요즘은 여우가 없지만 그 땐 많았거든. 그래서 보니 착착 눕혀놨어. 엄청 많았거든 53명이나 되니까.

-53명이요?
△몰라. 그 뒤 어른들이 53명이라 카데?

-그 당시 죽인 사람들은 누구였나요?
△군인이야. 철모 쓴 군인이지.

-죽은 사람들의 옷차림은 어땠나요?
△거의 다 한복이지 뭐. 몰라 양복 입은 사람도 있었는가 모르지.

-여우가 파헤치니 동네사람들이 다시 흙을 덮어주진 않았나요?
△그렇게도 못했어.

-그러면 계속 유해가 드러나 있었겠네요?
△그랬지. 우리 집에도 개를 한 마리 키웠는데, 그 놈도 뼈를 거기서 물고 다녀 내가 두들겨 패고 했어.

-그 뒤 시신을 수습해 가거나 한 일은 없었나요?
△없었어. 지금도 파보면 나올거야. 그 뒤에 송장들이 거름이 되어가지고 풀이 막 이렇게 나왔어. 거기를 밭뙈기로 쓰기도 했지.

-밭으로 썼다고요?
△밭이라고 할 것까진 없고, 그 때 땅이 귀하니까 그냥 뭘 심어먹기도 했지

 

 

 

<관련자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지난해부터 전국의 민간인학살 유해매장 추정지에 대한 유해발굴작업을 하고 있지만, 이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암매장 터가 발견됐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의 재조사와 함께 암매장 터에 대한 유해발굴도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기자는 지난 9일부터 20일까지 함양군 마천면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취재를 벌인 결과, 마천면 군자리 군자마을과 가흥리 사이에 볼록 솟아 있는 '솔봉'에서 최소 50여 명의 민간인이 국군에 의해 학살된 후 암매장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사건을 목격했다는 노인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1950년 한국전쟁 개전 초기 함양과 진주가 인민군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이던 7월 25일께 국군이 후퇴하면서 자행한 전형적인 불법 민간인학살 사건으로 나타났다.

김기태 할아버지가 당시 지켜봤다는 면사무소 뒤 언덕에서 학살터인 솔봉(빨간색 원 안)이 훤히 보인다.


이로 인한 희생자는 대부분 한복과 일부 양복을 입은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청년들이 대다수인 가운데 노인과 십대 청소년은 물론 미혼여성도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저녁무렵에 이들을 트럭에 태워온 군인들은 군자마을 아래 개천을 건너기 전 트럭을 주차한 후, 각각 포승줄로 묶인 피해자들을 일렬로 솔봉 학살현장까지 끌고 갔다. 현장에 도착한 군인들은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한청) 단원들이 미리 파놓은 길이 15~20m, 너비 2m가량의 구덩이 앞에 민간인을 한 명 한 명 세운 후, 착검한 총으로 총검술하듯 찔러 구덩이에 밀어넣은 후 총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학살 모습을 마천면사무소 뒤 언덕에서 지켜봤다는 김기태(76·가흥리 가채마을) 할아버지는 "우연히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나오면서 군인들이 사람들을 끌고 솔봉으로 올라가는 걸 보면서 몇 명인지 세어봤더니 52명이었다"고 말했다.

문창권(77·추성리 추성마을) 할아버지는 학살이 있던 날 아침, 한청 단장의 소집에 따라 마을청년들과 함께 그날 아침 삽과 괭이를 들고 학살현장에 구덩이를 팠다고 증언했다.

또 윤갑수(83·덕전리 내마마을) 할아버지는 당시 의용경찰 특공대원으로 목책을 쌓아놓고 경계근무를 하던 중 사건을 목격했으며,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군자리 군자마을 조상순(74) 할아버지도 "길게 파놓은 구덩이에 사람을 세워놓고 군인들이 대검으로 찌른 후 총을 쏘아 죽이는 모습을 마을에서 내려다 봤다"고 말했다.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군자마을에서 내려다 본 솔봉. 조상순씨가 지팡이로 학살 암매장터를 가리키고 있다.


목격자들의 증언 중에는 이들을 태우고 온 트럭이 '전라도 남원·구례쪽에서 왔다'는 말도 있었으나, 이후 소문으로는 '진주에서 온 사람들'이란 이야기가 많았다.

이들 증언을 당시 민간인학살 사건의 일반적인 사례에 비춰볼 때 6·25 발발 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이나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정치범들을 국군이 후퇴하면서 데려와 이곳에서 집단학살한 뒤 암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성일자 : 2008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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