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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2008년 12월 03일        조회 : 9374        작성자 : 관리자     

미군의 사천 곤명면 마곡리 민간인 학살

 

글 월간 말 이재진 기자 ljj@mal.co.kr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흔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나타난다. 잊어버리고 싶어도 뇌리에 박힌 아픈 기억이 삶의 걸림돌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강남덕(75) 씨는 한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내기가 벅찬 탓인지 한숨을 골랐다. 그리고 진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고통이 수반되는 그 진실을….

당시 17살이던 강남덕(75)씨가 미군 폭격 직후 자신이 몸을 숨겨던 웅덩이를 가리키고 있다.
  • 당시 17살이던 강남덕(75)씨가 미군 폭격 직후 자신이 몸을 숨겨던 웅덩이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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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베린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야기는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강 씨는 17살 건장한 청년이었다. 세 남동생을 둔 장남으로 한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송아지를 언덕배기에 데려다가 풀을 뜯도록 하고, 송아지를 지켜보는 일이 좋았다. 하지만 그 순수한 청년도, 그 평온한 농촌의 모습도 어둡게 내려앉은 전쟁의 그림자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좌익, 우익이란 말로 동네가 시끄러웠다.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리를 들었다. 무서웠다. 그리고 폭격이 시작된다는 말이 떠돌았다. 7월 31일 그 소문은 현실로 나타났다.

미군의 폭격으로 강 씨가 살던 경남 사천 곤명면 마곡리 마을에서 13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한 13명 중 강 씨의 아버지, 누나, 동생 2명이 포함됐다. 강 씨는 가족이 몰살된 현장을 지켜봤다. 누나와 동생 2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복부와 머리 팔 다리에 큼지막한 총알이 관통해 갈가리 몸이 찢겨버렸다.

아버지는 복부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복부에 총을 맞아서 창자가 들어갔다 나왔다 했지.”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던 강 씨는 “피가 벌컥벌컥 했어. 멍석을 깔고 누워 있으면 파리하고 벌레들이 들끓었던 기억이 나. 소독이라고는 소주밖에 없어서 상처에 들이부었지”라고 담담히 말했다.

이틀 후 강 씨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복부와 머리 등 전신에 상처를 입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는 일은 즉사한 다른 가족의 아픔과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요새 같으면 살았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상처를 입고도 이틀씩이나 버티신 분이니….”

즉사한 누님과 동생, 아버지 얘기를 하고서도 침착했던 강 씨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됐을까? 강 씨의 음성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마음씨 좋게 생긴 할아버지의 입에서 분에 찬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 베린(죽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산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당시 강 씨의 어머니는 무릎을 다쳤다. 강 씨의 표현대로 하면 ‘작살이 났다’고 했다. 총알이 무릎을 관통해 펴지도 구부리지도 못하는 불구가 됐다. 칡넝쿨을 짜내서 상처를 치료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한방 요법으로 지금도 통하고 있는 찰밥나무 뿌리를 힘겹게 찾아내 ‘질질 짜서 발라봤’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평생 아픈 몸을 이끌고 강 씨와 부상당한 7살 난 동생을 키웠다. 강 씨는 제대로 걷지도 못한 어머니가 독하게 마음을 먹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요새로 치면 자슥 내팽개치고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텐데… 어머니가 그 일 있고 나서 아버지, 동생 사진을 모두 불태워버리더라고… 그래서 사진이 한 장도 안 남아 있어. 아버지 기일인데, 온 동네를 뒤지고, 면사무소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지.”

아버지 기일에 쓰일 사진 한 장 없는 것도 서럽지만 사진을 없앨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이 더 안쓰럽다고 했다. 당시 42세였던 어머니는 88세로 세상을 등졌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힘겹게 산 어머니 얘기에 강씨는 “세상 베린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이란 말을 계속 되뇌였다. 세상 베린 가족들과 두 자식을 키웠던 어머니를 모두 지켜봤던 강 씨였지만 아픈 기억을 잊으려고 발버둥쳤던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강 씨 혼자 살아남은 말 못할 사연

강 씨는 온 가족이 몰살되는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강 씨는 당시 그 어처구니없는 일을 털어놨다. 폭격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마곡리 주민뿐 아니라 아랫마을 사람까지 하천 제방에 모여들었다. 흰옷을 입으면 폭격을 피할 수 있다는 말에 모두 흰옷을 입었다고 한다. 비행기만 지나가면 흰 헝겊을 흔들었다. 7월 31일에도 흰옷과 흰 헝겊의 물결은 계속됐다. 하지만 굉음을 냈던 미군의 비행기는 다른 날과 달리 ‘따다다다’ 기총 소리를 내뿜으며 흰 물결을 뻘건 핏빛으로 물들였다. ‘잔인한 비행’은 30여 분간 계속됐다. 강 씨는 폭격이 있기 바로 직전 어머니가 문단속을 하러 오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들판에 묶어놓은 송아지도 집 안에 들여놓지 못해 마음이 급했다. 하천 제방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약 500미터. 문을 잠그고 제방으로 돌아가는데 호주기(당시 전투기를 일컫는 말) 4-5대가 나타나더니 폭격을 시작했다. 강 씨는 재빨리 한 사람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넓이의 수풀이 뒤덮힌 작은 공간에 몸을 맡겼다. 폭격은 멈추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참혹한 현장을 보고 나서 겁이 덜컥 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아비규환이 된 가족을 뒤로 하고 제방을 벗어나 논두렁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논두렁 길 끝자락에 작은 웅덩이가 눈에 들어왔고 또다시 몸을 숨겼다. 당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강 씨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앞에서 가족이 죽어가는데 곧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 당시에 논두렁길도 아니었는데, 저쪽에 난 논두렁길 쪽을 따라 가니까 얼굴만 쏙 집어넣을 만한 웅덩이가 있어서 얼굴만 쳐박고 있었지.”

강 씨와 함께 그 현장을 찾았다. 사건 현장인 하천 제방이라는 곳은 폭 3미터가량의 작은 냇물이었다. 금방이라도 개구리가 튀어나올 듯 수풀이 우거져 있는 시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곳이었지만 60여 년 전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곳이라고 하니 음침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노근리 사건이 쌍굴다리에 셀 수 없이 많은 총탄 자국을 남겨 그날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반면 마곡리 사건은 하나의 총탄마저도 선명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문단속을 하러 집에 다녀온 사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은 강 씨는 당시 가족의 몰살 현장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사진 찍기를 부탁하자 그제야 어색한 폼을 잡기 시작했다. 강 씨는 하천 제방에 온 것도 오랜만의 일이라고 했다. 그 누가 가족이 죽어간 현장에 오고 싶어 하겠는가. 냇물이 온통 핏물로 물들고 팔뚝만 한 크기로 뜨겁게 달궈진 탄피들이 빗물처럼 쏟아졌던 그날의 기억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었다. 가족의 죽음을 뒤로한 채 당시 자신이 숨었던 공간을 가리키는 강 씨는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지 못했다. 문단속 하러 갔다가 몸 성히 혼자 살아남은 강 씨의 말 못할 아픔도 그곳에 있었다.

경남 사천 곤명면 마곡리 하천 제방



진실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60여 년 전 기억이 온전할 수는 없었다. 마곡리 마을은 진주 강 씨의 집성촌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사람들이 마을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60여 년 전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 대대로 살아온 집성촌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강 씨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경남지역 미군 양민학살 대책위원회에서 마곡리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하는 일을 도맡았다. 보도된 신문들을 스크랩하고 증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그이지만, 당장 사망자 수와 부상자 수를 물어보니 기억하지 못했다. 집 안에서 수많은 서류뭉치를 뒤졌지만 결국 관련 기록물을 찾아내지 못했다. 강 씨는 이틀 후에 일어난 옆 마을 조장리 일대의 폭격 사건도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더니 관련 기록물을 보고 “착각했다”고 말했다. 고통을 수반한 진실 찾기는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한 듯했다. 무엇보다 피해 주민들이 힘에 부쳐 있어 ‘진실찾기’는 더욱 힘들어 보인다.

1993년 최초로 지역신문에 보도됐고 영국 BBC의 노근리 사건 다큐멘터리로 미군 양민학살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국제적인 관심도 높아졌다. 제2, 3의 노근리 사건으로 경남 일대의 미군 양민학살도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진실은 조금씩 드러나고 있지만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과 보상은 아직도 요원하다.

지난 8월에도 진실과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조사를 나왔다. 위원회에서 한 달에 한 번 보내주는 책자에 진상규명 소식이 들어있지 않을까 매달 가슴을 졸이고 있지만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1993년 최초 보도 이후 진상규명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점점 줄어들었다. 부상당한 사람들이 세상을 하나둘씩 등지고 있고 ‘호소해도 별 소용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강 씨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2004년 미국 본토까지 다녀온 강 씨이다. 미국 뉴욕에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책임과 가해자들에 대한 형사책임을 묻기 위한 ‘코리아 국제전범재판’에 참가했고, 워싱턴 DC까지 평화 행진을 하고 미 의회와 백악관 앞에서 집회까지 참가했다. 강 씨는 미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24개국의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했다. 시퍼렇게 두 눈 부릅뜨고 보았던 미군의 만행이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고 하니 더욱 기가 막혔다. 백악관 앞에서 벌어진 집회에서 미군 폭격 증언을 담은 서류뭉치를 건네주려고 했지만 경호원들의 제지로 무산됐다. 서울 여의도 앞에서 열리는 미군 학살을 규탄하는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강 씨는 TV 화면을 통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보면서 1950년 7월의 그날이 떠올랐다고도 했다. “TV에서 이라크를 보니까 똑같더라고. 양민인데도 공습을 해버리고, 그 잘사는 나라가 어떻게 그 못사는 나라를 그렇게 할 수 있느냐”라는 강 씨의 성토가 이어졌다.

이명박 정부 집권 후 상황도 녹록치 않다. 과거사 진상 규명과 관련해 보수 언론들 사이에서 과거사와 관련된 기구 및 위원회를 통폐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혈세가 낭비되고, 이념 갈등을 조장해 국민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다.

왜 정부에 서운한 마음이 없었겠는가. 강 씨는 “요즘 이명박 대통령이 색깔론을 들이대는데, 있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강 씨는 언론의 인터뷰에도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다. 강 씨는 “영국 BBC까지 왔다 갔는데…”라고 말끝을 흐리며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국제적 관심이 고조될 때 국내 언론에서 보였던 높은 관심은 이제 옛일이다. 그래도 강 씨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강 씨는 서울에서 먼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기자에게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황급히 돌려주긴 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한 늙은 노인의 마음이 전해진다.

강 씨의 나이는 앞서 밝혀듯이 75세다. 몸이 성할 리 없다. 몸은 그렇다쳐도 진실을 눈앞에 보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억울할 뿐이다. 혹자는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지만 미군의 양민학살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이 같은 명제는 한동안 부정될 것이다. 아직까지 이들에게 진실은 잔인할 뿐이다. 그리고 그 진실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강 씨의 얼굴에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작별인사를 건네기 위해 버스정류장까지 나온 강 씨의 얼굴 사이로 노오란 가을 노을이 비추자 유난히도 깊게 패인 주름살이 한눈에 들어왔다.

작성일자 : 2008년 1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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