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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2008년 10월 21일        조회 : 10029        작성자 : 관리자     

미군의 진주 약골 진치령 터널 민간인 학살 사건


오랫동안 조심조심 걸었다. 어두운 터널 안에서 기차가 달려오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철길 옆으로, 빗물을 받아내는 도랑과 시멘트로 붙여놓은 돌담이 촘촘하게 쌓여있어 갑자기 기차가 달려오면 피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막막한 곳에 숨어 미군의 폭격에 몸부림치며 떨었을 피란민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조금이나마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기차가 오는지 귀를 쫑긋 세우며 어둠침침한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별다른 조명장치가 없어 들어가면 갈수록 주위가 점점 어두워졌다. 바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무성한 활엽수 숲을 헤치고 나가는 것 같았다. 성급하고 무서운 마음이 들어 이따금씩 소리를 질러 보았다. 돌아오는 것은 웅웅거리는 메아리뿐, 참으로 창백하고 여윈 공간이었다.


어둠이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무서운 흥분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기차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터널 안에서 흐르는 적막하고 냉랭한 공기에 마음이 잔뜩 위축된 까닭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서는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폭격으로 피란민 250~3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피를 토해내도 모자라는 억울한 죽음이었다. 특히 이곳의 학살은 미군이 사전에 정찰기로 피란민들의 동태를 살핀 뒤 계획적으로 벌인 것이어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당시 11살이었던 이영옥씨는 빛깔이 낡은 유년 시절의 기억을 꺼내놓는다.
“나도 군대에 다녀와서 알지만 사격을 하려면 상황실에 보고하고 승락을 받아야 가능해. 명령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폭탄을 몇 개나 떨어뜨릴 것인지,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사전보고가 다 돼 있는 거라고. 무조건 공격을 가할 수 없어.”


한없이 뻗은 철로를 따라 뒤돌아서 걸어 나오는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떨어져나간 팔다리를 붙잡고 죽어있는 사람들, 가족을 잃고 통곡하는 사람들, 얼굴과 몸에 화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사람들.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들의 유혈과 죽음의 현장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그려져 마음이 울컥했다.


반면 민간인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쏘던 미군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잔혹한 참사의 현장이 자신들에 의해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고, 지시받은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을까. 사지를 벌벌 떨며 죽어가는 얼굴,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 도움을 청하는 외마디 절규를 알고서도 이런 일을 벌였다면 그들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머리 위로 따가운 햇볕이 쏟아진다.


정찰비행 후 자행된 학살


950년 8월 2일. 진주시 주약동 약골 진치령 터널 안은 피란민들로 가득했다.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폭격을 피해 북쪽에서 내려온 피란민들과 진주시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이었다. 폭 5미터, 길이 244미터에 이르는 터널 한가운데로 사람 한명이 지나갈 정도의 길을 제외하고는 모두 꽉 차 있었다. 손만 대도 한꺼번에 쓰러져버리는 도미노의 골패 같았다. 이들은 터널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이날 저녁, 멀리서 미군 정찰기가 나타나 터널 주위를 빙빙 돌며 조명탄을 쐈다. 터널에서 나와 빛이 부서지고, 비행기 소음이 흩어지는 하늘을 피란민들은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육안으로도 민간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사라지는 듯 했다.


8월 3일. 오후 5시 30분. 피란민들은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아 아끼고 아껴 먹는 음식이었다. 서울에서 살다 가족들과 함께 피란 온 이영옥씨도 사촌누나가 볶은 콩을 줘 맛있게 먹고 있는 중이었다. 식량조차 귀했던 시절, 그는 자잘한 콩을 입에 넣으며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이씨가 볶은 콩을 손에 들고 터널에서 나오자마자 미군 전투기 4대가 철로를 스치듯이 맹렬한 속도로 날아와 기관총을 난사했다. 이씨는 철로 옆 바위틈에 급히 작은 몸을 숨겼다. 하지만 터널 입구에서 밥을 짓던 사람들은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울부짖었고, 절명한 사람들의 몸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총격에 놀란 피란민들은 터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를 안고, 늙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총탄을 피해 터널 안으로 달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밀리고 쓰러지면서 몸에 구멍이 뚫렸다.


터널 안쪽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쓰러졌다. C자 모양으로 뚫린 터널 안으로 들어간 총탄은 스케이트보드를 타듯 터널 벽을 타고 미끄러지면서 안으로 들어가 피란민들의 몸에 박혔다. 그 순간 피란민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필사적으로 도망갈 수도, 숨어 있을 수도 없는 완벽한 생지옥이었다.


아비규환의 지옥이 된 터널


잠시 총격이 멈췄다. 공포에 질려 있던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짜면서 미군 전투기 소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전투기는 터널 상공을 선회한 뒤 다시 되돌아와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미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몸에 다시 총탄이 박혔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의 목숨도 앗아갔다. 폭격이 계속될수록 시체는 갈기갈기 찢어졌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





▲ 미군의 기총소사로 삼촌, 숙모, 사촌 여동생을 잃은 이영옥 씨.


미군의 기총소사로 삼촌, 숙모, 사촌 여동생을 잃은 이영옥씨의 말이다.
“죽을 쏟아 부은 것처럼 피가 흘러 나왔어. 몸에 흐르는 피가 2리터 정도 되는데, 그 큰 면적에 홍수가 난 것처럼 피가 많았지. 고무신을 신고 있었는데 신발이 미끄러워서 걷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 사람들의 팔, 다리도 다 떨어져 나갔고. 전쟁영화에서 나오는 것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참혹했지. 사람의 형체가 없었거든.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잘렸어. 미군이 사용한 기관총은 케네바(컬리버) 50구경이야. 신체 부위에 맞으면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미군 전투기는 다시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철로를 뒤덮은 자갈이 팡팡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튀었고, 신음소리와 울음소리, 화약 터지는 소리가 터널 안에서 맴돌며 귀청을 찢었다. 피란민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죽음의 공포와 싸웠다.


폭격이 끝난 뒤 터널 안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심연의 괴생물체가 등장하는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어머니의 시체에 매달려 숨을 거둔 어린아이의 머리는 없었고, 피범벅 덩어리 안에는 잘려진 손과 발이 튀어나와 있었다. 얼굴 없는 시체의 살점은 공중으로 날아가 터널 벽에 붙어 있고, 뼈가 다 부서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부러졌다. 골격만 남아 검게 그을린 시체도 많았다.


바위틈에 숨어 목숨을 건진 이씨는 가족들을 찾기 위해 터널로 달려갔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잔해 속에서 가족의 시체를 찾았다. 인근 주민들도 폭격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그때 사람 인심이 그랬어. 바깥마을 사람들까지 자진해서 도와줬지. 지금 같았으면 내 가족의 일이 아니면 도와주지 않잖아. 하지만 그때는 아무런 관계가 없더라도 힘을 보탰어. 시체는 근처 산에 묻었어. 연고가 있는 분들은 시체를 찾아갔고. 누가 누군지 몰라 못 찾아간 분도 있었지.”
이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의 현장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커다란 고통이었으리라.


심도 깊은 진상규명필요





▲총탄 자국을 시멘트로 메운 모습이 선명하다.


올해 3월 진주유족회가 창립됐다. 이들은 주민의 증언과 기록을 정리하고 현장 답사를 진행한 뒤 과거사위에 자료를 넘겼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여느 민간인 학살과 같이 이곳의 사건도 진상규명이나 피해보상의 길은 멀기만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고, 생존자와 유가족들이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증언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영옥씨의 말이다.


“바라는 것은 없어. 하지만 명예회복을 해서 죽은 이들의 영령은 달래줘야 한다고 생각해. 전 가족이 몰살당해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은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재단도 만들고 제사를 모시고 있는데, 걱정이야. 생존자가 나밖에 없어. 당시 오른쪽 발목에 관통상을 당했던 김사복씨라고 계셨는데 작고했지. 나까지 죽고 나면 어떻게 될지. 옛날에는 터널 입구에 탄환 자국도 많았는데 지금은 다 시멘트로 메워 놨더라고. 지금은 가 봐도 찾기 어려울 거야.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진상규명이 힘들어. 참 답답해. 이렇게 기자들 만나서 얘기하고 그러면 뭐하나 그런 생각도 들고.”


진주 주약동 약골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수많은 민간인 학살 중에서 정찰비행 후 자행된 계획적인 학살이었다. 어느 생명이나 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심도 깊은 진상규명을 벌여야할 문제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는 다른 유형의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한 치의 은폐 없이 정확한 진상규명이 이뤄져 참혹한 죽음을 맞았던 수많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해야 할 것이다.
김태근 진주유족회 회장은 “전쟁과 관련 없는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이 진주지역에 많이 벌어졌다”면서 “미군에 의한 학살뿐 아니라 보도연맹 등 여러 가지 유형의 학살에 대해서도 정확한 진상조사와 피해보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남 사천지역에서 벌어진 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


진주에서 승용차로 20여분 달리면 사천시다. 이곳에서도 미군의 잔인한 폭격과 기총소사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현재까지 증언이 나온 곳은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와 마곡리 2곳이다. 미군의 사천 민간인학살 사건은 월간 말 11월호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조장리 민간인 학살 사건


1950년 8월 2일.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 앞 하천제방에서 끔찍한 살육이 벌어졌다.
당시 이곳에는 주민 300여명이 피란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흰옷을 입고 한 곳에 모여 있으면 미군이 민간인으로 알고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천 제방에 모였다. 하지만 오후 1시경 미군 비행기 2대가 정찰을 마치고 돌아간 뒤 잠시 후 미군 폭격기(F54기) 4대가 나타나 무차별적인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해 150여명의 주민이 죽거나 다쳤다.


마곡리 민간인 학살 사건


1950년 7월 31일. 사천시 곤명면 마곡리 앞 하천제방에서도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이날 주민들은 피란을 나와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미군 전투기 4∼5대가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기관총 사격과 폭격을 30여분 가해 13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아예 입을 꼬매고 살았어"

[연속기획] 미군의 진주 이반성면 새골 민간인 학살사건


한 여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낮게 드리운 집으로 들어갔다. 한 할머니가 하얀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올린 채 고추를 널고 있었다. 그에게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했던 장소를 묻자, 그는 집으로 들어가서 아들을 불렀다. 아들도 족히 60세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쟁 때 진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피란을 가도 죽은 목숨이어서 전쟁이려니 하고 숨죽이고 살았지요. 여기 마을 주민들도 미군한테 폭격을 당했다는 소리를 어르신들한테 들었던 적이 있어요. 이 길로 쭉 들어가서 기찻길을 건너면 새골이에요. 거기 가서 다른 어르신한테 물어보세요.”


낮게 떠 있는 기찻길 위에서 발길을 잠시 멈췄다. 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작은 길은 뒷산을 향해 아스라하게 뚫려 있었고, 바로 여기를 기점으로 철로는 마을을 남북으로 휘감으며 남해로 뻗어 있었다. 시골의 풍경은 늘 그렇지만 이곳도 평화롭고 고적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산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처음 보지만 낯설지 않은 산맥,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하천. 모든 것이 완벽한 시골 농가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한국전쟁의 상흔은 지나치지 않았고,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인민군의 남하를 막겠다는 구실이었지만 미군은 민간인들과 피란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가했다.


진주시 반성면 새골 민간인 학살 사건





▲ 피란민들이 내려왔던 진주 반성면 새골 마을 기찻길. 미군은 이곳 너머 뒷산에 숨은 민간인들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소사를 했다.


진주시 일대에는 철길을 따라 북쪽에서 밀려온 피란민들로 넘쳐났다. 칠팔십대 노인에서부터 젖먹이 어린아이까지, 비행기 폭격과 총탄을 피해 내려오는 동안 이들은 무너진 가옥과 길거리에 널브러진 시체를 보면서 전쟁의 비정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1950년 7월 18일. 인근 야산에서 폭탄이 작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군과 인민군의 전투였다. 귀청을 울리는 굉음에 놀란 마을 주민들과 피란민들은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못하고 마을 뒷산에 있는 방공호와 동굴로 뿔뿔이 몸을 숨겼다. 마을 기찻길 옆에서 만난 한 할머니의 말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들하고 마을 뒤에 있던 동굴에 숨었어요. 지금은 가도 동굴이 없어요. 다 막아놨거든요. 처음 동굴에 숨었을 때는 별 일이 없었어요. 며칠 후 다시 전투가 벌어져서 동굴로 숨었는데 미군 전투기가 날아와 폭격을 했지요.”


미군의 폭격이 시작됐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 산기슭에서 인민군 행렬을 발견한 전투기가 하늘을 덮듯이 나타나 폭탄을 떨어뜨렸고, 폭탄은 민간인들이 숨어있던 방공호도 덮쳤다.


폭탄이 떨어진 현장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비극이었다. 주민들은 하늘을 항해 입을 벌리고 흰자위를 드러낸 채 쓰러졌고, 몸이 찢기고 구멍이 난 채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은 계속되는 폭격으로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가족들이 죽고, 아내가 자식을 안고 쓰러져도 절박한 표정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날 미군의 폭격으로 민간인 10명이 사망했다.


동네 어귀에서 만난 한 노인은 기자의 눈을 지극히 바라보면서 응어리진 마음을 털어놓았다.
“진주에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점령했어. 세상이 바뀐 거지. 그때부터 미군들은 닥치는 대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쐈어. 얼마나 피가 많이 났는지 피비린내가 진동했지. 사람의 몸이라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어져 죽었고. 부모자식이 포개져서 서로 감싸며 죽은 모습을 봤어.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메어지던지.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했어. 보복이 두려워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예 입을 꼬매고(꿰매고) 살았지. 말로 다 못해.”


또 다른 미군의 진주 민간인 학살 사건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학살 사건


1950년 7월말 어느 날 오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에서 미군의 폭격이 자행됐다. 진주 쪽에서 들려오는 폭격소리에 놀란 시목마을 주민들은 전장을 피해 피란길에 나섰다. 이때 주민들 머리위로 미군 전투기 1대가 대평면 방향에서 날아왔다. 주민들은 미군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행렬을 지어 달구지길을 걸었다. 하지만 전투기는 시목마을(감나무골) 뒷산을 두어 번 선회한 뒤 돌아와 피란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쳐 몸을 숨겼다. 전투기는 주민들이 바위 뒤, 두렁 아래, 가옥 사이로 사라지자 급히 팔미 방향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주민들을 향해 총탄을 퍼부은 사건이었다. 딱 전쟁놀이였다. 이 사건으로 어린이 1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했다.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 학살 사건


1950년 8월 6일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한 날이었다. 천진스런 소년들은 마을을 뛰어다녔고, 어른들은 뜨거운 햇볕을 피해 새벽부터 밭에 나가 풀을 뽑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 어디에서도 미군과 인민군이 교전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마을의 방앗간을 비롯해 이웃해 있던 여러 가옥 위로 미군 전투기가 나타나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이 사건으로 강가매(당시 12세)씨의 가족 4명을 비롯해 이웃주민 7명이 사망했다. 강가매씨는 아침밥을 먹고 이웃에 놀러갔다 폭격소리를 듣고 남의 집 덕석 밑에 숨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 있던 어머니(이씨)와 16살의 언니, 8살의 여동생(호연), 4살의 남동생(판도)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아버지는 사랑방에 있다가 화를 면했으며, 바깥에 있던 오빠와 올케, 둘째 오빠만 살아남았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당시 미군이 떨어뜨린 폭탄 하나가 아직도 강순중씨의 담장 사이에 묻혀있다. 한 주민은 “전자감식을 통해서라도 폭탄을 찾아내면 이날 미군 폭격의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진주시 집현면 죽산리 부흥 나루터 기총소사 사건


1950년 추석 무렵, 인민군이 진주에서 산청군 생배량 방향으로 후퇴할 때 금산면 중천리, 송백리, 상의리 주민 10여명은 집현면 부흥 나루터에서 미천면 방향으로 강을 건넜다. 피란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군은 주민들이 강을 건너자마자 기총사격을 가해 3살 된 아이를 업고 있던 어머니 등 주민 3~4명이 사상됐다.

 

작성일자 : 2008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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