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숙환으로 미국서 영면, 방대한 미국 4.3자료 발굴 탁월한 공적

   
▲ 평생을 제주4.3과 양민학살 연구 조사에 받쳐온 이도영 박사가 13일 (미국 현지시간)에 타계했다.
1999년 대전형무소 정치범 집단학살 문건을 공개해 그동안 입소문으로 알려졌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을 세상에 드러낸 제주출신 재미사학자 이도영 박사가 13일 오후6시(미국 현지시간) 워싱턴 자택에서 타계했다. 향년 67세.

미국 현지에서 고인의 임종을 지켜본 지인이 <제주의소리>에 전해온 바에 따르면 지난 4년여간 투병생활을 하던 고인은 이날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오래동안 병마와 싸워온 고인은 신앙생활로 한 때 위기를 넘기는 듯 했으나 전립선암이 재발하면서 4년여 투병을 끝내 이기지 못했다.

대정읍 하모리 출신인 고인의 가족은 3대가 4.3에 얽힌 기구한 운명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4.3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에 헌신했으며, 특히 미국에서 방대한 자료를 발굴해 그동안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고인의 운명적인 삶은 그 나이 불과 네 살이던 1950년 8월20일 바꿨다. 이날은 젼우와 직녀가 오작교를 건너 만난다는 칠월칠석. 대정면사무소 서기로 일하면서 4.3초토화작전을 무사히 넘긴 부친 이현필씨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으로 붙잡혀 마을사람 250여명과 함께 섯알오름에서 학살당했다.

고인의 할아버지는 자식이 섯알오름에서 학살당하자 함께 죽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백조일손유족회를 만들었다. 비석도 세웠다. 이 비석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깨졌다. 할아버지는 이 후에도 백조일손유족회를 이끌었지만 숨을 거두기까지 예비검속 학살과 4,3의 한을 놓지 못했다.

부친을 잃은 고인은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대구사범대학을 나왔다. 군대는 뚜렷한 이유 없이 쫓겨났고, 교사생활도 잠시 뿐이었다. 그 혹독한 연좌제에 걸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망명아닌 망명을 갔다. 보험외판원과 접시닦이로 고학을 하며 석.박사를 마쳤다,

1999년 5월 제주출신 고광림 박사 자제인 고홍주씨가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성 인권차관보가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다.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두건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미국정부 문서를 열람하고 있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몇 달 후 비밀문건에서 해제된 사진 3건이 그에게로 왔다. ‘대전형무소 정치범 1,800명 처형(1950년 7월초)’ ‘서울에서 공산 게릴라 30명 처형(1950년 4월20일)’ ‘대구근교 부역자 처형(1951년 1월)’

   
▲ 미 정보장교가 대전 산내학살 현장을 촬영해 미국정부에 보고한 사진. 미 정부는 1999년까지 50년동안 관련 자료와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 사진은 13일(미국 현지시간) 타계한 제주출신 재미 4.3연구가인 이도영 박사에 의해 1999년 세상에 드러났다.
이 박사는 이중 사진 18매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사진을 제민일보 김종민 기자에게 보냈다. 제민일보는 1999년 12월 24일 특보로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사진을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리고 2000년 1월 6일 LA <한국일보>가 그것을 다시 받아 기사화 하면서 국내 전 언론은 물론 세계 각지로 타진됐다. 4월에는 서울주재 AP 통신사를 통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LA타임즈 등에서도 타전했다.

이 박사는 또 제주에서 한 인사로부터 건내 받은 자료를 조사한 끝에 서귀포시 도순리 ‘형살자 명부’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명부에는 4.3때 죽은 희생자와 가족들의 나이와 직업, 또 자식은 누구인지 등이 적혀 있는 사실상 완전한 연좌제 자료였다. 

이도영 박사는 자료에 발굴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기록청(NARA)에 살다시피 하면서 제주4.3과 민간인학살 관련 자료를 모았다. 제주4.3희생자진상조사보고서에 실린 사진도 이 박사 제공이 많다. 제주4.3평화박물관에 걸려있는 좌표가 있는 미군 작전지도도 그가 기증한 자료다.

특히 2008년 9월~2009년 6월까지 제주공항(옛 정뜨르비행장)에서 발굴된 259구의 유해는 그가 꼼꼼히 기록해 놓은 옛 지적도가 없었으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제주공항이 들어서기 이전의 지적도를 확보한 고인은 이 일대 주민들을 찾아다니면서 1949년 10월 불법군사재판을 받은 후 정뜨르비행장에서 총살된 희생자들이 묻힌 곳을 일일이 기록했다. 어느 밭 몇 번지에 몇 명을 파묻었고, 증언자는 누구인지 또 전화번호까지 꼼꼼히 기록해 놓은 완벽한 자료였다.

   
▲ 제주공항 즉, 옛 정뜨르 비행장에서 유해가 발굴됐다. 이도영 박사의 구 지적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알뜨리비행장에서 학살당한 희생자들이 묻힌 곳이 도두리 공항일대란 것은 알았지만 공항 그 넓은 땅 어디를 파야할지 엄두를 내지 못할 때 고인의 지적도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고인은 이 지적도를 평소 깊은 교류를 유지해 온 4.3전문가에게 줬고, 이게 다시 유해발굴팀에게 전해져 60년만에 제주공항에 묻혀있던 유해들이 빛을 보게 됐다.

예비검속 학살사건을 조사해 온 이도영 박사는 2000년 8월 월간 <말> 출판부에서 「죽음의 예비검속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 얼마 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져 예비검속에 대한 진상규명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이 박사의 발굴 사료가 밑바탕이 됐다.

고인의 소원은 아버지를 죽인 섯알오름 학살 최종책임자를 밝히는 것이었다. 마치 김구 선생의 실질적인 암살자가 누구인지를 쫓기 위해 안두희를 평생 쫓아 다닌 권중희씨처럼. 

끈질긴 그의 추적은 섯알오름 학살현장 책임자였던 중대장을 찾아 시인을 받기는 했지만 누가 최종 명령권자 였는지 지휘계통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2001년에 한국전쟁당시 육군본부 정보2과장이던 김종필 총리에게 쳐들어가 예비검속학살책임자가 누구인지 따졌고, 결국 김 총리는 이 박사에게 “(전쟁당시 양민학살은) 전부 김창룡(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4과장)이 한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김종민 제주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은 이도영 박사에 대해 “섯알오름 학살의 최종 책임자가 실제로 누구인 것은 알지만 끝내 김구 선생이 경우 그랬던 것처럼 밝히지 못한 게 고인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라고 말했다. 김 전문위원은 “이 박사 집안이 3대에 걸친 비극을 당했지만 할아버지가 만든 백조일손 유족회를 통해 4.3진상규명 운동에도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고인의 활동이 4.3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후배들에게 많은 귀감이 됐다”고 말했다. 또 “4.3진상규명운동을 벌일 당시의 가졌던 초심을 잃지 말 것을 늘 일 깨워 준 분이셨다”며 고인의 죽음을 안타 까워 했다.

영결식은 미국 현지시간으로 15일 고인이 평소 다니던 워싱턴소재 교회에서 진행된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2녀를 두고 있다. 고인의 영면을 빈다.  <제주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