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국이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상대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지난 10월 하순 방일한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이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관련해 상당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직후
미국 국방부 고위 관리가 털어놓은 말이다. 이 관리는 또 "지금까지 미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을 변치 않는 상수로 여겨왔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라고도 말했다. 게이츠 국방장관이 일본을 방문하기 약 한 달 반 전에도 이런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제프 모렐 국방부 대변인이 일본에게
인도양에서 미국 군함에 대한 급유를 재개할 것을 공개 요구했다. 그랬더니 후지사키 이치로 주미 일본대사가 발끈했다. 그런 결정은 일본이 알아서 할 일인데 미국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후지사키 대사는 "미국과 일본은 대변인을 통해서 얘기하는 관계가 아니다"라며 일침을 놓았다.
예전 같으면 일본의 이런 대꾸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때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돈독한 동맹을 자랑하던 미국과 일본이 요즘 심상치 않다. 특히 미국에 대해 자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하토야마 체제가 출범한 뒤 미국은 심기가 무척 뒤틀려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하토야마 정권이 취한 일련의 대미 행동이 '동맹'이라고 보기에는 도를 넘어섰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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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3일 도쿄에서 만난 오바마 대통령(왼쪽)과 하토야마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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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하토야마 정권은 취임 한 달 만에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조처를 여러 번 취했다. 먼저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돕는 차원에서 실시하던 인도양 미군 함정에 대한 급유 제공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과 일본이 맺은 일련의 핵 밀약을 조사하겠다고 공언했다. 또한
유럽연합처럼 아시아에서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새로운 정치·경제 연합체를 건설하겠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 미·일 관계를 위기로 내몰고 있는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관련해 전임 정권이 한 기지 이전 약속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도 했다.
하토야마 정권이 이런 조처를 미국과 사전 상의 없이 공표한 데 대해 오바마 행정부는 당혹감을 넘어서 내심 극도의 불쾌감을 가져왔다. 지난 10월 하순 게이츠 국방장관이 일본을 방문해 하토야마 총리와 면담한 뒤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평소 온화한 말투에 예의 바르기로 이름난 게이츠 장관이 하토야마 총리와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논의한 직후 "이제 앞으로 나아갈 때다. 일본이 기지 이전 문제를 파투내면 상황이 굉장히 복잡해지고 비생산적이 될 것이다"라며 공개적으로 엄중 경고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오바마, 하토야마 체면 살려주었지만… 게이츠 장관의 감정 폭발은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같은 유력 신문의 1면을 장식했고, 미국의 주요 텔레비전 방송과 CNN도 톱뉴스로 다룰 만큼 미국 내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언론은 한결같이 이제 미·일 관계의 호시절은 끝났다며, 대미 자주독립 외교를 외치는 하토야마 정권이 들어선 이상 미·일 동맹이 상당한 시련을 겪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일 동맹에 대한 염려는 11월13일 일본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이 하토야마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뒤 행한 회견에서도 확인됐다. 핵심 쟁점인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관련해 두 사람 모두 상반된 생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물론 오바마 대통령은 기지 이전 문제와 관련해 미·일 양국이 고위 실무단을 발족해 해답을 빠른 시일 안에 찾겠다고 말했고, 하토야마 총리도 수긍했다. 그러나 핵심은 고위 실무단이 협의할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고위 실무단의 임무는 이미 미·일 간에 합의한 기지 이전의 '실행 부문'에 관해서만 회담을 갖는 것임을 분명히 강조했다. 즉 양국 고위 실무단이 발족한 이유는 오키나와 중심부인 후텐마 지역에 주둔한 미국 해병대를 섬 외곽으로 이전하는 것을 골자로 한 양국 합의의 실천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서이지 하토야마 총리의 요구처럼 미군 기지를
오키나와 섬에서 빼거나 일본에서 아예 철수시키기 위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미군의 오키나와 섬 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오키나와 주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하토야마 총리는 미국의 이런 방침을 수용하기 어렵다.
미국의 정치 분석가들은 고위 실무단 발족에 오바마 대통령이 합의해준 것은 하토야마 총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지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본다. 기지 이전에 관한 종전의 합의를 하토야마 정권이 어떤 식으로든 실천하지 않는 한 미국 측 고위 실무단은 어떤 다른 합의도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토야마 정권이 이 문제를 마냥 미루는 것을 미국이 방치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미국은 기지 이전 계획에 따라 오키나와 기지에 있는 4만7000명을 2014년까지 새로 이전하는 외곽 기지에 배치하고, 일부 해병대 병력을 괌으로 재배치할 계획이다. 따라서 기지 이전 계획이 지연될수록 미국 측 후속 계획도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존스홉킨스 대학 국제대학원(SAIS)의 일본 전문가인 켄트 칼더 박사는 "만일 하토야마 총리가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 때까지 기지 이전을 미룰 경우 미국은 기지 이전과 관련해 세워놓은 계획이 모두 흐트러질 것을 크게 우려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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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가 미·일 간 최대 현안이다. 위는 후텐마 비행장을 오키나와 내의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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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미·일 관계가 기지 이전 문제로 험악한 상황으로 치닫는 가운데 미국 내 반응도 엇갈린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하토야마 총리에게 기지 이전 문제와 관련해 좀 더 시간을 주지 않고 너무 윽박지른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인다. 유엔 고문인 나스린 아지미 씨는 11월16일자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 "게이츠 국방장관이 일본에서 보인 행동은 페어플레이를 바라는 일본인의 감정을 무시한 채 동맹도 친구도 아닌 짜증스러운 부모 같았다"라고 질책했다. 부시 행정부 시절 백악관 아시아 선임 국장을 지낸 마이클 그린 박사도 기지 이전 문제와 관련해 하토야마 정권에 좀 더 시간을 줘야 한다는 일본 전문가들의 주문을 미국이 무시해 '불필요한 위기'를 자초한 구석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린 박사는 하토야마 정권이 기지 이전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년 여름까지 미루겠다고 공언한 마당에 미국도 더 이상 참지 못했을 것이라는 동정론도 편다.
미국 여론 '신중론'이 대세 현재 미국 내 여론은 하토야마 정권의 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관련한 '배신 행위'는 괘씸하지만, 미·일 동맹을 단순히 안보동맹 차원으로만 보기에는 양국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서 신중론이 대세를 이루는 형국이다. 일본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지만 미국도 동북아 안보질서를 위해 일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미국은 오히려 유럽보다 일본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마이클 오슬린 일본 국장은 "미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을 통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반대로 일본은 귀중한 방위동맹을 얻었듯 양국은 오랜 세월 서로가 필요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오슬린 국장은 일본이 기지 이전 합의를 무시하고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 공동체를 창설하겠다고 하는 것은 향후 양국 공조에 대한 우려를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점증하는 영향력 증대에 양국 동맹이 과연 어떤 구실을 할 수 있을지에 관해 불확실성을 낳고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