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핵외교가 화려하게 시작됐다. 동유럽 미사일방어(MD)계획을 취소한 데 이어 23일 유엔 총회연설에서 이란과 북한의 핵계획 위협을 세계 정상들에게 각인시켰다. 다음달 1일 이란과의 핵협상을 앞두고 러시아의 협력을 얻어내는 성과도 거뒀다. 하지만 그의 비핵화 구상이
이스라엘의 위협을 외면하고 있어 서방의 '이중잣대'라는 반감도 증폭되고 있다.
오바마는 23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 대이란 추가제재 협력을 사실상 약속받았다. 오바마는 "이란은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너무 많이 어겼다"고 비난했고, 메드베데프는 "제재보다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입장엔 변함없지만 때로는 제재가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고 응답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핵개발에 세계가 아무 대응도 못할 것이라고 믿으면 이란은 큰 실수를 하는 것"이라며 경고했다. 데이비드 밀리반드 영국 외무장관은 "이란이 진지한 답을 내놓지 않으면 다음 단계를 밟겠다"는 6개국 공동성명을 낭독했다.
일단 미국은 '핵 없는 세상'을 내세워 이란 압박에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BBC방송, AFP통신 등은 러시아의 달라진 입장에 주목했고
뉴욕타임스는 "오바마가 이란 문제와 핵 비확산 이슈에서 성과를 거뒀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오바마가 설파한 '모두가 책임지는' 새로운 국제질서, 즉 다자주의 주장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평가했다.
그러나 이란 압박과 비핵화 구상이 오바마의 뜻대로 추진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여전히 이란 제재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추가 제재의 내용과 수위, 효력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유엔 총회에서 미국과 서방의 압력을 맹비난하면서도 "핵협상에 열린 자세로 임할 것"이라며 강온 양면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면서 "다음 협상 때 서방에
농축 우라늄 판매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활동을 중단시키려면 농축 우라늄을 내놓으라는 뜻이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이란은 서방의 압박 명분에 물타기를 하기 위해 자국 핵 전문가들과 사찰단의 면담도 허용하기로 했다.
'중동 비핵화 구상'은 사실 이라크전 뒤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한차례 내놨던 제안이다. 중동국가들도 대부분 찬성했다. 미국과 서방은 이란 탓을 하지만 비핵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이스라엘이다. 지난 17일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지금은 비핵화를 얘기할 상황이 아니다"라며 공개적으로 이를 거부했다. 이란은 아직 우라늄 농축 단계에 있지만,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국이자
핵확산금지조약(NPT) 미가입국이다.
바라크 발언 다음날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스라엘 핵개발 사실이 드러난 지 18년 만에 비난 결의를 채택했다. 제3세계 이사국들이 추진한 것이었다. 19일 이집트는 유엔 안보리에 이스라엘 핵 조사를 요구했다. 중동국들은 오바마의 '핵 없는 세상' 정책을 부시의 '중동 비핵화' 구상의 재판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시사주간 타임은 "20년 가까이 묻혀온 이스라엘 핵문제가 새삼 부각된 것은 비핵화의 실현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며 "미국이 아무리 압박한들 이란과의 핵협상은 쉽지 않을 것"이라 내다봤다.